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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선사들, 국내 조선업계 외면...선가 저렴한 중국에 발주

팬오션 등 한국 선사들, 중국에 잇따라 선박 발주 나서
“애국심만으로 사업 못해” 실질적인 정부 지원책 절실

신주식 기자 (winean@ebn.co.kr)

등록 : 2017-03-11 00:21

▲ 팬오션이 운영하는 5만7000DWT급 펄프운반선 전경.ⓒ팬오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주가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 중견 선사들이 잇따라 중국 조선업계에 선박 발주를 단행하고 있어 업계의 관심이 몰리고 있다.

중국 조선업계가 한국보다 선가를 20% 이상 낮추는 등 선사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함에 따라 한국 선사들도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조선업계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만큼 한국 선사들이 한국 조선업계로 발길을 돌릴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11일 업계 및 외신에 따르면 팬오션은 최근 중국 양즈장조선에 6만3000DWT급 오픈해치일반화물선(open-hatch general cargo carrier) 5척을 발주했다.

팬오션은 지난달 말 공시를 통해 펄프운반선 5척 건조를 위해 약 1655억원의 자금을 투자하기로 결정했으며 계약 종료일은 오는 2020년 9월 11일이라고 밝혔다.

공시에 따르면 팬오션이 이번에 발주한 선박의 척당 선박가격은 2900만달러 수준으로 이들 선박은 인도와 함께 브라질 피브리아(Fibria)가 수출하는 우드펄프 운송에 투입될 예정이다.

앞서 지난 2010년 팬오션은 STX조선해양에 총 20척의 5만7000DWT급 펄프운반선을 발주한 바 있으며 당시 척당 선박가격은 4500만달러 수준이었다.

7년간 케이프사이즈 벌크선의 시장가격이 5700만달러에서 4200만달러로 26% 이상 떨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팬오션이 발주한 이번 선박들의 가격은 한국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오픈해치화물선의 경우 갠트리크레인(gantry crane) 장착 여부에 따라 선가가 다소 달라지며 2010년 전후로 한국 조선업계가 수주하는 5만DWT 규모의 오픈해치화물선의 선가는 5000만달러 가까운 선가에 계약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선가가 10여년래 최저수준까지 떨어졌다고는 하나 3000만달러 수준에 6만DWT가 넘는 오픈해치화물선을 수주한다는 것은 한국 조선업계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금액”이라고 덧붙였다.

팬오션에 이어 한 국내 중견 해운사도 중국 진하이중공업과 선박 발주를 위해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해운사는 4척의 케이프사이즈급 벌크선 발주를 추진하고 있으며 현지 업계에서는 이들 선박의 척당 가격이 4000만달러를 밑돌 것으로 보고 있다.

진하이중공업은 지난달에도 그리스 차트월드(Chartworld Shipping)와 뉴캐슬막스급 벌크선 2척에 대한 건조계약을 체결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 3일 기준 18만DWT급 케이프사이즈 벌크선의 시장가격은 4200만달러로 지난해 말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호주 뉴캐슬항을 입항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선박인 뉴캐슬막스 벌크선이 케이프사이즈보다 큰 21만DWT급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진하이중공업이 국내 해운사로부터 수주한 선박들의 척당 선가는 차트월드로부터 수주한 선박들보다 낮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중견 선사들이 잇따라 중국 조선업계에 선박 발주를 단행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한국 중견 조선업계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벌크선 시장이 중국에 완전히 넘어가버린 탓인지 한국 조선사들이 벌크선 수주에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분위기”라고 설명했으나 조선업계에서는 “한 척의 선박이 아쉬운 상황에서 관심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반박했다.

▲ 중국 진하이중공업이 건조한 케이프사이즈 벌크선 전경.ⓒ진하이중공업

중국 조선업계는 부족한 일감 확보를 위해 같은 중국 조선소들끼리도 치열한 가격경쟁에 나서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 한국 조선업계와의 선가 격차는 20% 이상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선박 계약조건으로 중국 금융권이 전체 선박 건조대금의 90%까지 대출해주고 있으며 일부 중국 조선소는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건조비용도 자체 신용을 통해 융통함으로써 선사가 선박 발주에 투자하는 초기비용 자체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선사들 입장에서는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여러 척의 선박을 발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조선소가 무리한 저가수주에 나섰다가 파산하더라도 투입한 초기비용 자체가 없으니 건조계약 해지에 따른 손실위험도 없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선사인 머스크(Maersk)가 중국 조선소에 다수의 중소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했는데 이 선사는 중국 조선소 외에 현대미포조선과도 협상을 진행했었다”며 “머스크 실무자는 현대미포와 계약을 원했으나 중국 조선소가 현대미포보다 30% 가까이 낮은 선가를 제시하자 머스크 경영진으로부터 중국 조선소와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 조선업계는 중국과 같은 저가수주에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채권단의 수주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을 제외한 한국 조선소들은 채권단 관리 하에 있으며 이들 조선소의 채권단으로 있는 금융권은 선박 수주에 필수적인 선수금환급보증(RG, Refund Guarantee) 발급 조건으로 엄격한 수주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있다.

조선업계에서는 채권단의 지나치게 높은 수주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한국 조선업계에 선박을 발주하고자 하는 글로벌 선사들이 결국 가격조건으로 인해 발길을 돌리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다.

상선을 시리즈선으로 수주할 경우 첫 호선보다 후속 호선으로 갈수록 설계비용 절감과 기자재 대량구매에 따른 원가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첫 호선부터 1% 이상의 수익성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산업의 특성을 무시한 채 숫자만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또한 지난해부터 선박 건조비용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철강재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한데 이어 선박 건조비용의 3~5%를 차지하는 선박용 도료를 생산하는 업체들도 원자재가격 급등을 이유로 가격인상을 추진하고 있어 조선업계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업계와 마찬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한국 선사들에게 애국심만으로 한국 조선업계에 선박을 발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며 “강력한 정부통제와 OECD 비회원국이라는 이점을 활용하고 있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극심한 경기침체 속에 중국 조선업계가 무리한 수주를 이어가고 있는 만큼 결국 중국 조선소의 상당수는 머지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의 경기침체가 중국 조선업계의 몰락을 더욱 앞당길 수도 있으나 한국 조선업계도 올해 중 일감이 바닥나기 때문에 선박 수주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