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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N 칼럼] 7월의 얼음(氷)

  • 송고 2023.07.20 06:00 | 수정 2023.07.27 07:51
  • EBN 관리자 외부기고자 ()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출처 EBN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출처 EBN

내 안의 무언가를 심하게 갉아 먹힌 것처럼 쓰륵쓰륵 녹아내리던 저녁.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때였지만 길어진 여름해로 아직 환한 낮 기운을 타고 건너편 교보생명 건물에 걸린 글귀가 선연히 들어왔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속 한 구절이다. 습기와 열기가 뒤섞인 공간에 방치돼 마구잡이로 녹아내리던 얼음을 꽁꽁 언 냉동고에 집어넣은 것처럼, 보자마자 갑자기 정신이 쨍해지면서 이대로 녹아내리지는 말자는 결연함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튀어 올랐다.


그렇지. 모든 얼음은 녹지만, 녹기 위해 만들어진 얼음은 없지. 한낮 타는 목마름을 일시에 해갈하고, 앓아누운 이의 선열(腺熱)을 조속히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졌지. 그게 얼음의 의미지. 그러니까 어차피 녹을 처지라 생각하며 속절없이 녹아내리기만 하는 얼음은 많이 후지다.


그럼에도 끓는 물에 던져지면 어차피 채 1분도 견디지 못하고 녹을 얼음인 주제에, 뭘 녹지 않겠다고 아득바득 꾸역꾸역 용을 쓰면서 살아야 하나 싶던 어떤 저녁은 잠시 소리 내 울었다.


2013년 중순 비교적 빨리 비트코인을 알게 돼 학습인지 투자인지 구분도 없이 비트코인 매매를 시작하면서 롤러코스터 같은 가격 급등락 속에서도 그럭저럭 재미를 봤었다.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던 2017년은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산업 모두가 시작 단계라 어차피 국내에 전문가라 할 사람도 많지 않았고, 어쩌다 보니 나도 블록체인 전문가 중 한 명으로 활동하게 됐다.


가상자산 투자로 대단한 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거래소든 업체든 잘 보이려 눈치를 살펴야 할 이유도 없어서 어디서든 앞뒤 재지 않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도움이 필요한 기업을 후원할 수도 있었다. 작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견인(牽引)하던 업체에 대짜로 뒤통수를 맞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나름대로 쾌적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2022년 6월에 “원래 뒤통수는 믿는 사람한테 맞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처지가 되면서, 사람도 잃고 돈도 잃었다. 무엇보다 지금껏 기술 기업이라 믿고 전심으로 돕던 업체가 투자자들의 눈을 속이는 전문 ‘코인 팔이’ 사기꾼으로 변질돼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망연자실(茫然自失)’이란 게 뭘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됐다.


사기성 업체라 판단한 직후 곧바로 업체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해당 업체 대표가 “직원들에게 줄 임금이 없다”는 말로 빌려 간 비트코인 7개의 반환을 요구했다. 곧바로 업체 대표는 내가 모르는 각종 비용의 청구서를 붙여 “돌려줄 게 없다”는 취지의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물론 청구 내역 중 내가 아는 바는 없었다.


지난 1년간 해당 업체와의 소송에 든 법무 비용은 받아야 할 돈을 넘어섰지만, 그저 돈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법무 비용이 얼마가 들던 반드시 7개 비트코인과 법정이자를 제대로 받아낼 것이다. 며칠 전 법원에 출석한 해당 업체 대표는 “회사가 아니라 개인이 빌린 것이고, 능력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갚아보겠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마음이 갈려 나가는 참담한 경험이었지만 배운 바는 컸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만들어지기를 갈망했지만, 그 갈망의 이면에는 남에게 업혀 가고 싶은 구차하고 게으른 내 마음이 있었다. 옆에서 적당히 도와주다가 나도 슬쩍 그 성공에 올라타려는 느슨하고 안일한 마음에 걸맞은 결과값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젠 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엔 내 발로 직접 가야 한다. 누구의 등에 업혀 갈 수 없다. 가고 싶은 곳은 멀고 높은데 제 발로 걸어가기는 싫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업혀갈 등을 찾는 시선이 삶을 구차하고 비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명확히 알았다.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언다. 물리학적으로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1963년 탄자니아 중학생이 발견한 이 현상은 후에 이 학생의 이름을 따‘음펨바 효과’라 불린다. 뜨거운 물로 얼린 얼음은 찬 물로 얼린 얼음보다 심지어 더 천천히 녹는다. 끓는 동안 내부 기포를 밖으로 내보냈기에, 찬 물로 만들어진 얼음보다 더 투명하고 더 단단하게 얼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이 찬물보다 더 빨리 얼고 더 천천히 녹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어떤 지점에 이르면 삶이 격렬하게 뜨겁게 끓어올라 견딜 수 없을 듯 느껴져도 그 순간을 결연히 버텨내면 그 누구보다 더 멀리 더 오래 나아갈 수 있다.


모든 얼음은 녹는다. 그러나 얼음은 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얼음은 시원함을 위해 만들어졌다. 탄생의 의미를 잘 받아들인 얼음은 완전히 녹아내린 한참 뒤에도 누군가의 더움을 식혀주는 위로가 된다.


7월의 얼음이란 이렇게 멋진 것이다. 그러니 쉽사리 녹아내리지 말고 지금 가던 그 길을 계속 가자.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야 할 길이 반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만큼 더 오래오래 녹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주문을 외우자.


“얼음 빙(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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