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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N 칼럼] 노동이여, 안녕(Bonjour Travail)

  • 송고 2023.11.27 06:00 | 수정 2023.11.27 06:00
  • EBN 유재원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 외부기고자 ()

유재원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법률사무소 메이데이)

유재원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법률사무소 메이데이)

유재원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법률사무소 메이데이)

한때, 유럽 소설이 유행하면서, 신예작가의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2개의 소설을 연달아 히트했는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작품과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것이 특히 그러했다. 그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은 아버지의 재혼을 당면한 사춘기 소녀의 공허함과 상실감 등을 표현한 내용이었고 유럽사회의 정취와 사람들간의 정서를 감수성 짙게 그려낸 수작(秀作)으로 기억한다.


정작 그 소설의 원제는 “슬픔아! 안녕하세요?”라고 안부를 물어보는 인사였었다. 슬픔을 보내는 ‘안녕(아듀)’이 아니라, 슬픔을 당면하고 이제 당당히 맞아들이는 “안녕하세요?(봉쥬)”였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으로 번역(오역?)되어 오히려 한국에서 애잔한 멜랑콜리를 일으키며 또다시 공전의 히트를 친다. 원래의 제목도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창의적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문화가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이별의식으로 의도적으로 오번역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본론이다.


“노동이여, 안녕”.


이것은 작별의 의미나 재회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쉽게 결별하거나 (누군가가 함부로) 소멸시킬 수 있는 공공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확히는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십니까?”라고 묻고자 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보면, 노동은 인간 존재와 결코 결별할 수 없고, 죽음의 순간까지 인생과 함께 생존해 왔다. 마치 ‘모든 사람이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민법 제3조)’는 법언처럼 인간과 노동은 함께 숨쉰다.


우리 헌법에서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정하고 있는 경우는 참으로 독특한 것이겠으나, 건국 이래 국민 누구에게나 노동의 숭고한 권리와 의무는 존중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 ‘근로’를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여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하기 싫다”는 말은 허구헌 날의 하소연이 아니다. 샐러리맨의 한주는 고달프고 낮은 임금을 호소하는 직종도 여전하다.


2700만명이 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건강한 직장과 성실한 노동을 괴롭히는 요소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경제활동가능인구 중 취업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고, 한국 사회의 초고령화는 눈앞에 현실이 되었으며, 경제성장률도 2% 이하로 둔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시나, 노동현장의 갈등(해고, 징계, 노사분쟁 등)도 여전하고, 산업재해라는 직업병과 각종 사고위험이 상존하며, 직장내괴롭힘 같은 신종 악화요인도 보인다. 회사(사용자)에서는 인사관리의 어려움과 고비용으로 인하여 가급적 인력(노동)을 통한 생산 또는 서비스를 대폭 줄이고자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노동’이라는 재화는 사회적인 필요성과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도 일하지 않고 누구도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노동에 닥친 미래적인 위기다.


이른바, 노동의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s comming!) 좋은 일자리(디센트 워크)는 줄어드는데, 사용자(사업주)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사회적 의무)를 하지 않을 태세다. 한술 더 떠, 노동력을 제공할 근로자그룹들이나 스스로 일하는 자영업멤버들도 점차 직업을 버리거나 이직하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시설수익이나 자본소득에 의존하여 종국적으로 ‘노동(LABOUR, WORK)’을 영영 이별하려는, 파이어(FIRE)족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노동시장에서 10번씩 이직하는 근로자도 많고, 심지어 전문직 자영업에 뒤늦게 뛰어드는 인구도 많다.


돌이켜보자. 150년전, 100년 전에 유토피아를 이야기 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세계관에서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였다. ‘노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T FREI)’라는 극우전체주의를 증오했다.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열리고 인류애가 만천하에 퍼지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노동은 인간이 원할 때만 하게끔 하고, 자의적인 노동이탈이 발생해도 사회와 인민들이 (공유경제를 통해서) 서로 충실히 조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작 이상한 건, 정작 노동자 계급에게 지옥같은 노동을 해방시킨다고들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조차 (놀고먹는) 유한자본계급(leisure)을 따라하는 것밖에 안 되는 탁월한(?) 모순(矛盾)을 가졌다.


결국, 공산주의는 그 특유의 비효율성, 비인간성으로 체제가 무너졌고, 몇 안남은 사회주의는 관리계급의 등장과 통제에 소요되는 비용 낭비로 인하여 미래적으로 사멸(終滅)될 것으로 예상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노동을 (누구 맘대로, 어떤 잣대로) 해방시키는 그런 시도는 현재까지도 실패했고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진화하거나 변화할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퇴보하여 노동의 가치가 사회 저변으로 침잠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 정답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노동의 면면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구성원과 노동의 콜라보(공존, 공화)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노동은 안녕한가?” 자문하고,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십니까?”라고 재차 주변에 물어보면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주변 환경에서 자신의 노동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노동의 존재 이유로서는,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회의 후생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거나,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점 등등의 여러 노동가치관이 있었기에, 결국 노동의 안녕에 관한 질문은 각자가 각자의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노동현장의 갈등만을 해결하거나, 기계적으로 산술적으로 일자리를 공급하는 고용노동정책으로는 노동의 본질이나 노동의 사회적 기능을 무척 쉽게 판단하는 것이라고 본다. 대한민국 사회는 일과 일터에 관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평가를 심어주는 변환이 필요한 시점을 맞이했다.


정부가 그러한 선순환을 이끌면서 모든 국민들이 근로의 현장에서 보람있는 노동을 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오랜 고난을 딛고 사회 구성원들이 합심하여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들이 일터에서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는 모습, 그 성실한 노동을 통한 우리 사회의 선순환이 절실하다.


이에 따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경제사회문화의 영역에서 기회를 균등히 하고 그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는(대한민국 헌법 前文)’ 이념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마음속의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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